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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문] - Humanities/수필

빈 수레가 요란하다

by 겨울색하늘 2020. 2. 25.

창의, 혁신, 융합──.

 

  정말 좋은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서든 중요하다고 외치는 단어지만, 이제는 어떤 사기와 기만을 행하기 전에 사용되는 포석 정도의 의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단어가 오염되었다는 건 이런 걸 말함인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런 종류의 단어들을 듣게 되면 복잡한 심경이 되는데, 요즘은 이 단어들이 너무 분별없이 남발되는 바람에 더이상 단어로써 아무런 힘도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다. 분명 그 자체로써는 굉장한 단어임에도 이제는 이 단어들을 듣는 순간 "아──, 또 그 타령이야?" 라고 질려버린 표정으로 조소하게 되었다. 더 이상 말로써의 힘을 갖지 못하게 된 이 단어들은 이제 이 곳에서는 실현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건 물론이고 비웃음 거리마저 되어버렸다.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는 주제에 분별없는 사람들이 이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가져다 사용한 탓일 것이다.

  이제와서 되돌아보면, 조금 엄격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분위기가 조성되었어야 했다. 이런 사회적인 경향을 좌우할 수 있는 단어들을 사용할 때는 마땅히 결과로써 증명해 사용할 자격을 얻고서 사용할 수 있게끔 했어야 하는 게 맞지 않았나.

  ​이 단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사회적 경향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을 때였다. 가령, 스마트폰이 처음 나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 인터넷이 처음으로 보급되고 정보 공유가 엄청나게 다양하고 빨라져 버린 것,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생활 반경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 것 등이 있다. 너무 세계적인 범위에서의 커다란 예를 든 것 같으니, 조금 더 범위를 줄여 작은 예를 들자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훈민정음의 발명으로 한문만 사용하고 대부분 문맹이던 백성들의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목화의 보급으로 겨울 옷의 경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것의 예로써 듣고 자라왔는데, 겨우 클립의 이용 방식을 조금 달리 생각해본다거나 달걀 껍질을 보다 손쉽게 벗겨낸다거나 하는 수준의 것들을 자꾸 창의적인 것이라고 우긴다면 그건 어쩌면 이 단어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작게라도 변화가 있다면 나은 편이다. 지금 이 시점에도 여전히 '창의혁신융복합'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는 단체, 개인, 행사 중에 정말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만한 가시적인 결과를 냈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확신할 수 있다). 애초에 그런 단어들을 붙이고 있는 것들이 뭘 하겠다는 건지 장황한 설명을 듣는다 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기엔, 시간이 한참 지나도 깜깜 무소식인걸 보면 내 이해력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저 단어들은 여기저기 길거리에 흩뿌려져 있는 광고지에 싸구려 색감으로 칠해진 채, 아주 크게 쓰여있는 '파격 세일' 이라는 글자 정도의 가치밖에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젠 저 단어들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즉, 저 단어들을 보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으며, 아마 여지없이 '전부' 그렇게 연결지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현대로 접어든 이 나라 안에서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을 정도로 쉽고 가벼운 단어들이 아닌데.

 

  그런 면에서 더이상 이 단어들이 막연히 남발되는 건 지금이라도 사회적 차원에서도 막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삭아버렸나. 이젠 저 단어들을 보고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그저 씁쓸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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