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출장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라 공항에 내렸을 무렵부터 돌아오는 내내 비가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택시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살짝 들떠있었다. 겨울비를 보는 게 오랜만이어서 그랬던 걸까. 차갑고 건조한 공기 속에 촉촉히 떨어지는 물방울이 어쩌면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좀처럼 한파가 오지 않는 베트남의 겨울과는 달리, 한국의 겨울은 굉장히 쌀쌀했지만 내겐 이게 익숙하다.
택시를 타고 무심코 한숨이 나왔는데,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한기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저마다의 입김이 하얗게 번지는 걸 보고 있자면, 겨울이라는 계절은 여타 계절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새삼스레 호흡이라는 걸 의식하게 하는 계절이랄까, 출국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춥지는 않았었는데. 날씨라는 건, 항상 그대로인듯 하면서도 어느새 정신차리고 보면 걸친 옷의 두께가 갑자기 변해있는 것 같다.
일정을 마치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집에 들어오니 한참 동안 난방 한번 돌리지 않은 집 안은 바깥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백의 기간이 여실히 드러났다.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들어오자마자 거실 등과 난방을 켜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거실에 앉아 캐리어를 열고는 TV를 틀었다. 인문학 강의라고 해서 어떤 교수가 한창 신나게 열강하고 있었는데, 얼핏 듣다보니 큰 주제가 행복인 것 같았다.
‘행복, 이라…’ 의식하지 않은 실소가 잠시 새어나오고, 짐을 풀어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그래도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왔다는 왠지 모를 안도감에 작게나마 행복 비슷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뭐 이런 것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런 행복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스스로도 이 단어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쓸데없는 추측과 주관적인 상상이 덧붙는 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는 반증인지는 몰라도, 요즘은 행복과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에 대해 몇 시간씩이나 이야기하는 강연이 부쩍 많아진 것 같다. 종종 드라마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다 보면 여기저기서 비슷한 주제로 바람을 잔뜩 불어넣는 것 같지만 글쎄. 이런 주제에 대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확신을 갖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굉장히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전에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서 잔뜩 모여드는 걸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좀더 깊은 사색이 필요한 현실적인 고민거리들은 아마 거의 대부분 해결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게 아닐까.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태어난 누구나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처음 보았던 그 당시에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글귀가 아직까지 힐링이라는 탈을 쓰고 여기저기 많이 인용되고 있다는 건, 이 단어가 상상하게 해주는 허상이 그 만큼 달콤하며, 그 달콤함을 방해하는 것 같아 보이는 외부의 어떤 것을 원망하도록 쉽게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그저 남녀 한 쌍의 사랑의 결실, 조금 더 원초적으로 얘기하자면 번식의지로 태어났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굳이 말하고자 한다면 죽을 자격 뿐이지 않을까. 그 외에는 어떤 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혹은 운으로라도 일구어 나가야 한다. 행복이라는 건 그 과정 속에서 일순간 스쳐 지나가는 수만 가지 느낌 중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자격이나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의무나 책무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뭐──, 살다 보면 행복한 날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지속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인가 하면, 당장 다음날 이 행복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현재의 행복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도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스스로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일이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려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는데, 아직까지 행복이라는 개념이 파놓은 함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을 보면 뭐랄까, 조금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행복을 부정하느냐고 묻는다면, 앞서 말했다시피 그런 건 아니다. 어쨌든 사람인지라, 행복하고 싶은 욕구 정도는 가지고 있고 안타깝게도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행복에 대한 고민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한 채로, 감정에 어떤 형태로든 물을 주게 되면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는 걸 계속 경험해 왔으니까──, 이건 되도록 건조한 상태를 유지시키는 게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와중에도 행복감이라는 건, 종종 뜻하지 않게 찾아오곤 한다.
행복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개념은 맞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고민해봐야 부질없는 개념인건 확실하다. 추구한다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멀어지고 싶다고 해서 전혀 다가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수치화 할 수 없는 개념들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이라, 추상적이고 막연한 개념들을 비교의 잣대로 삼는다거나, 목표로 설정한다던가, 어떤 행동의 이유가 되는 것을 굉장히 경계하는 편이다. 가늠할 수 없는 원리 원칙에 기반한 행동은 무절제로 이어지기 십상이며 구체적이지 못한 목표는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비교에 있어서도 이런 개념들은 합리적인 결론과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그건 비단 행복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반대로 불행도, 사랑도, 미움도, 재미도 마찬가지로, 이런 감정에 기반한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이유로 회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게 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지금 행복에 대한 내 스탠스는 어떤가 하면──, 행복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행복에 잠시나마 가까워질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반증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다. 그렇지 않아도 늘어만 가는 고민 리스트에 행복 따위를 끼워 넣을 여유는 조금도 없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있을 자리에 있을 만큼 머물다가 가버린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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