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6 [에세이]거울의 반대편 창 밖의 네온 사인이 밝게 빛날 때까지 많은 대화를 하고서, 끝내 막차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라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막차였지만 다행히 자리는 꽤 여유가 있었고, 오른쪽 뒤의 한 구석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순식간에 뒤로 흩어지는 창 밖의 밤풍경을 바라보며 괜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너무 단조로운 걸까──. 새로운 생각 없이 어제 머릿속을 맴돌던 그 생각 그대로 오늘도 여전히 한 걸음의 진전이 없는 채로, 어디까지나 시간의 흐름에 발을 맞춰 혹은 떠밀려 나란히 걷고 있을 뿐인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뿐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앞서는 방법 같은 건 그렇게 쉽게 떠올릴 수 있는게 아닌데. 물론 생각해보면 관점에 따라서는 다채로운 하루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새로웠던 건 아니.. 2022. 3. 9. 풍선껌은 단물이 빠지고부터 진짜 시작 어느 금요일, 자정이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일을 마무리짓고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며 일회용 컵에 마지막 커피를 담았다. 많이 늦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느긋해질 수 있는 시간. 운동장 반만큼 넓은 사무실 그 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고 있음을 새삼 느꼈지만,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외롭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주섬주섬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노트와 펜을 가방에 담고는, 로비로 나왔다. 은은한 가로등 아래 아스팔트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걸 보니,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잠깐 소나기가 내린 모양이었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찬 바람이 아직은 시원할 정도로 불고 있었고, 도보 위로 잔뜩 떨어진 나뭇잎들이 빗방울을 머금은 채, 가로등 불빛을.. 2021. 7. 6. [단편] Untitled #4. 카드로 술값을 계산하고 끼이익── 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거리의 지하철 역 앞에서 혜와 헤어지고 나서, 횡단보도에 서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신호등 바로 옆에 파란 트럭에서 어묵과 떡볶이, 그리고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날씨도 아직 쌀쌀한데 혜가 손난로 하나 없이 양 손에 입김을 불던 게 떠올라, 하나 쥐어서 보내지 못한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사실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나도 모르게 붕어빵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어떤 책에서, 삶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의 연속이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다지 영양가 없는 .. 2020. 4. 22. 빈 수레가 요란하다 창의, 혁신, 융합──. 정말 좋은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서든 중요하다고 외치는 단어지만, 이제는 어떤 사기와 기만을 행하기 전에 사용되는 포석 정도의 의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단어가 오염되었다는 건 이런 걸 말함인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런 종류의 단어들을 듣게 되면 복잡한 심경이 되는데, 요즘은 이 단어들이 너무 분별없이 남발되는 바람에 더이상 단어로써 아무런 힘도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다. 분명 그 자체로써는 굉장한 단어임에도 이제는 이 단어들을 듣는 순간 "아──, 또 그 타령이야?" 라고 질려버린 표정으로 조소하게 되었다. 더 이상 말로써의 힘을 갖지 못하게 된 이 단어들은 이제 이 곳에서는 실현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건 물.. 2020. 2. 25. 큐비즘 하루는 추위가 조금 수그러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함박눈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왠지 올 겨울의 마지막 눈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출근길에 오랜만에 우산을 펴고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길 위를 서걱서걱 걷는 상쾌한 느낌을 만끽했다. 높은 연구소 빌딩 사이로 새하얀 함박눈이 천천히, 그리고 사뿐히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왠지모를 생소한 여유로움에,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의 선명한 경계선 위를 걷고있는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적인 온도의 간극을 새삼 실감하게 되버려 밀려 올라오는 씁쓸한 기분에 조금 더 가까운 걸까. 넓은 회사 로비의 커다란 회전문으로 들어서며 오늘은 어떤 일을 해야할지, 올라가면 어떤 일부터 처리를 해야할지, 자리에 도착하기도 .. 2020. 1. 3. 두 가지 관점 "자동차 경주를 하는데, 헬멧과 안전복, 안전벨트가 없다면 어떤 선수가 과감한 플레이를 할 수 있을까? 사고가 나도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있어야 선수는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읽자마자 정말 말도 안되는 핑계라고 생각했다. 선수가 자차를 갖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경주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 피고용의 관계가 얽혀있다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지 말지를 선택권으로 준다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음식이 풍족한데 누가 자발적으로 사냥을 하려고 하겠나. 배부른 맹수보단 굶주린 맹수가 사냥에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하물며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헬멧과 안전복, 안전벨트 같은 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 후에 받는 대우이지 결코 기량 발휘를 약속하.. 2020. 1. 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