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이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장르문학이 꽤나 많아졌다. 신작 리스트를 살펴보면서 그렇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는데, 사실 더 넓게 보면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이제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가 이야기를 진행하는 작품들이 하루 하루 새롭게 출시되고 있다.
이렇게 이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느덧 유행처럼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현실이 다들 지루하긴 한가보구나──, 하고는 새삼 느끼게 된다.
이세계물의 시작을 살펴보면 보통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시작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이계에서 소환을 한다거나(그것도 어딘가에서 엉켜버린 잘못된 소환), 어딘가에 설치된 부비트랩을 우연히 건드리는 바람에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우연에 의해 이세계의 어딘가에 떨어져, 우연한 만남으로 동료를 얻고 우연한 기회로 힘을 얻어 성장해나간다는──, 수많은 우연들이 겹치는 과정을 그린다. 아마 그정도의 우연이 겹쳐 발생할 정도의 행운이라면, 현실에서 진작에 로또 1등이 한 다섯 번 정도 당첨이 되고 돈을 찾아 돌아가는 길에 벼락을 맞아 죽을 뻔 하지만 살아남는 행운 정도로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현실과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다른 세계에서의 재시작이 정말 매력적이긴 한 걸까. 조금 비슷하게 상상할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해보면, 잠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히말라야 중턱 어딘가라거나, 아마존 한가운데 라거나, 혹은 어느 나라인지도 모르는(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사용하는) 도시 한가운데라거나, 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나서 두근두근 한다기 보다는 막막함이 먼저일 것 같은데.
뭐──, 사람에 따라서 그것도 어떻게든 잘 해쳐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재시작한 그 인생이 지금과 많이 다를 거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다이나믹하게 언밸런스한 스탯 배분이 있지 않고서는, 인간의 역량이라는 건 어느 세계에서나 통계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원초적으로 현실에서 성공한 사람이 이룬 것들을 다 버리고 이세계로 넘어가서 맨손으로 재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제정신이라면.
인생도 오류가 있을 때 노트북처럼 쉽게 리부팅을 할 수 있다면 상당히 편리할 것 같지만, 글쎄. 마음 편히 재시작 버튼을 눌렀는데 기적적으로 제대로 부팅이 되거나, 혹은 두 번 다시 부팅할 수 없었다, 라는 암울한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시 원코인 클리어가 아닌 인생은 코인 수만큼 매력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사회][인문] - Humanities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선껌은 단물이 빠지고부터 진짜 시작 (0) | 2021.07.06 |
---|---|
밤 (0) | 2020.03.05 |
[DIARY] 20.02.27 (0) | 2020.02.27 |
빈 수레가 요란하다 (0) | 2020.02.25 |
큐비즘 (0) | 2020.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