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문] - Humanities20 [에세이]거울의 반대편 창 밖의 네온 사인이 밝게 빛날 때까지 많은 대화를 하고서, 끝내 막차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라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막차였지만 다행히 자리는 꽤 여유가 있었고, 오른쪽 뒤의 한 구석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순식간에 뒤로 흩어지는 창 밖의 밤풍경을 바라보며 괜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너무 단조로운 걸까──. 새로운 생각 없이 어제 머릿속을 맴돌던 그 생각 그대로 오늘도 여전히 한 걸음의 진전이 없는 채로, 어디까지나 시간의 흐름에 발을 맞춰 혹은 떠밀려 나란히 걷고 있을 뿐인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뿐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앞서는 방법 같은 건 그렇게 쉽게 떠올릴 수 있는게 아닌데. 물론 생각해보면 관점에 따라서는 다채로운 하루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새로웠던 건 아니.. 2022. 3. 9. [설정집] 안토니우스의 일기 7월 11일 무더운 여름. 길드의 모든 마법사들은 굉장히 지친 기색이었지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금단의 마법, T계열의 마법 중 하나인 포탈의 2차 실험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되어 이룬, 마법의 역사상 최고의 성과로써 기록될 것이다. 길드의 일원으로써, 역사적인 이번 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곧 모든 국가의 최고 정예로 구성된 군대가 시온(Xion)의 이름 아래 이 곳으로 집결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원정계획, ‘메토이케시아’는 실질적인 실행 단계만을 앞두고 있었다. 원정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것이며, 곧 불덩어리가 될 이 행성으로부터 무사히 벗.. 2022. 1. 20. 집 떠난 뒤 맑음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는 이제 곧 지나쳐 가 버린다. 지나쳐 가 버려서, 아마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과 사물과 장소를, 싫어하게 되기란 어렵다. ** 집 떠난 뒤 맑음 (하) 254p.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그것도 무려 상하권으로 2권 분량의 소설이 발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거의 감격스러운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별 기대없이 갔던 서점이었다. 최근에는 매번, 그렇게 기대없이, 그러나 혹시 모르는 한 가닥 근거 없는 희말 때문에 종종 들르는 서점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마주쳤을 때는 굉장히 기뻤다. 집 떠난 뒤 맑음. 17살 이츠카와 14살 레이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여행을 떠난다. 한 통의 편지만 남겨두고서.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위함한 일이지만, 미국이라.. 2021. 7. 28. 플라톤 「향연」 향연 : 플라톤(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 저자 : 강철웅 - 출판 : 아카넷 - 발매 : 2020.02.28 읽을만한 신작이 가뭄인 탓에 이번에도 고전을 읽었다. 이번에는 매번 리스트에만 올려놓고 읽지 못하고 있었던 플라톤의 . 플라톤의 은 비극 경연에서 첫 우승한 아가톤의 집에서 벌어진 향연에서의 대화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다. 아폴로도로스라는 인물이 내용을 들려주는 식으로 시작하는데, 인물들의 동선과 시점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살짝 집중력이 떨어지면 금방 화자를 놓치게 되서 뒤로 돌아와야 했었다. 이 부분은 읽는 내내 상당히 피곤했다. 아무튼, 본론의 시작은 본격적인 향연의 행사 시작에 앞서, 파우사니아스가 전날 과음을 핑.. 2021. 7. 9. 풍선껌은 단물이 빠지고부터 진짜 시작 어느 금요일, 자정이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일을 마무리짓고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며 일회용 컵에 마지막 커피를 담았다. 많이 늦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느긋해질 수 있는 시간. 운동장 반만큼 넓은 사무실 그 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고 있음을 새삼 느꼈지만,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외롭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주섬주섬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노트와 펜을 가방에 담고는, 로비로 나왔다. 은은한 가로등 아래 아스팔트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걸 보니,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잠깐 소나기가 내린 모양이었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찬 바람이 아직은 시원할 정도로 불고 있었고, 도보 위로 잔뜩 떨어진 나뭇잎들이 빗방울을 머금은 채, 가로등 불빛을.. 2021. 7. 6. [단편] Untitled #4. 카드로 술값을 계산하고 끼이익── 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거리의 지하철 역 앞에서 혜와 헤어지고 나서, 횡단보도에 서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신호등 바로 옆에 파란 트럭에서 어묵과 떡볶이, 그리고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날씨도 아직 쌀쌀한데 혜가 손난로 하나 없이 양 손에 입김을 불던 게 떠올라, 하나 쥐어서 보내지 못한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사실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나도 모르게 붕어빵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어떤 책에서, 삶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의 연속이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다지 영양가 없는 .. 2020. 4. 22. [단편] Untitled #3.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내 머릿속에 빛이 다시 돌아와, 밖이 어두워진 만큼 내면이 환해지는 시간. 어디선가 밤이라는 시간은 내면의 일출과 함께 찾아온다고 하였던가. 매일 이 시간이면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사무실을 대충 정리하고 나와 펍으로 향했다. 로비의 커다란 자동 슬라이드 문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그리고 펍의 작은 나무 문의 삐걱대는 소리가 여느 때와 같았다. “좀 늦었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혜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미 깨끗하게 비워진 소주 두 병이 테이블 끝에 나란히 서 있었고, 세 병째로 보이는 병이 반 쯤 비워져 있었다. 도착한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안 그래도 요즘 통 보이지 않아서 멀리 출장이라도 갔을 거.. 2020. 3. 29. [단편] Untitled #2. 첫 눈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공터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옅은 눈이 내려앉는다. 고요한 하늘. 건조한 겨울 공기가 무거웠다. 앙상한 나뭇가지, 그 위에 살짝 앉은 눈의 무게만으로도 꽤 벅차보일 정도로. 2008년의 어느 날, 아침 일찍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든 채로 눈이 적당하게 쌓인 공원을 가로질러 걷는다. “하아──” 짧게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새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눈은 꽤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렸지만, 그런 만큼 날씨는 비교적 포근했다. 아직도 머리가 무거웠다. 분명 어제 마신 예거가 원인. 다음 날 아침, 항상 후회할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밤의 유혹. 그러고 보면 단 한 번도 머리가 가벼운 출근길은 없었다. 매일 밤마다 조금씩.. 2020. 3. 22. [단편] Untitled #1. ▶ 눈치 채지 못한 운명을 우연이라고 했던가. 그저 정해진 길 위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모든 안배가 끝난 작은 상자 안에서,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그저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과정 속에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드는 풍경을 바라보며 우연이라 믿고 계속 걸었다. 1. 오늘도 늦은 퇴근에 이대로 하루를 흘려보내기가 아쉬워서 집 근처의 펍에 들렀다. 어두운 실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투명한 유리잔이 소박한 푸른색 조명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모습이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창가 쪽 구석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각자 조용히 보드카를 홀짝이고 있었고, 또 다른 몇은 칵테일을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차분한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2020. 3. 18. 밤 '누구에게나 똑같이 밤은 오지만 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구나' 하고──, 어딘가에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겠지만, 지붕 위에서 빛나고 있을 별들에 대해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그건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게 존재에 대한 인식조차 없이 떠올릴 수 있는 대부분의 밤은 형광들의 불빛 아래서 보냈다. 항상 밤은 독서의 시간이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기 직전, 푹신한 의자 옆에 책이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창 밖은 어두웠지만 침대 옆 조명 불빛이 비추는 작은 영역 안에, 차가운 종이와 빼곡히 채워진 작은 글자들은 항상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꽤나 큰 하루의 위안이 되었었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시간이 흘렀지만 뭐──,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은 어찌.. 2020. 3. 5.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