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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문] - Humanities/수필

모처럼의 휴가

by 겨울색하늘 2019. 8. 17.

  정신없이 바쁜 시기가 지나고, 연초에 아무 생각없이 일단 정해 두었던 휴가가 다가온 것을 휴가 바로 직전에 알람 메일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눈이 녹기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해 계획을 세우며 이렇다 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아 나중에 생각하기로 미뤄두고 한여름 요맘때에는 어딘가 놀러 갈지도 모르니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로 휴가를 마주하게 되니 꽤나 당황스럽더군요. 그렇다고 무언가 계획이 세워질 때까지 휴가를 미루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은 하루 쉬면서 남은 며칠 간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도 나도 다들 설레는 표정을 하고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걸 보며, 혼자 남아서 일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더라구요.

 

  휴가 첫 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요일. 아침 일찍 미용실에 들러 이미 제 때를 넘겨 덥수룩하게 자라버린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잘라내고,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무더위를 피해 카페로 들어가 노트북을 펴고 앉았습니다. 8월 햇살의 강렬함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어서,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으니 마침 주문하고 금방 나온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커피와 노트북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펼친 노트에 이것 저것 적어 내려가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학창 시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습니다. 그 시절, 그러니까, 여름 방학이 되면 이 시간 즈음에는 지금처럼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느긋하게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말이죠.

 

  떠올려보면 그 시절과 지금은 같은 노트북을 펴 놓고 있어도 상황은 다른 점이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그때는 듣고 싶은 강의가 별로 없었어도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했던 강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다지 학구열이 높았던 학생은 아니었던 탓에──, 강의보다는 다른 것들에 조금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생 신분 안에서는 어느정도 규정된 커리큘럼 안에 단계별로 촘촘히 구성된 강의들을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했습니다. 반쯤 수면상태로 들었던 교양 과목들이라던가,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공학용 계산기와 씨름을 해야 했던 역학 과목들은 그것들이 실제로 필요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납득할만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시간표에 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작 듣고 싶어도 원하는 강의를 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글쎄요──, 강의라는 형태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차라리 쉬운 일이었겠지만, 지금 알고 싶은 것들은 강의라는 형태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스스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하나씩 부딪치며 일일이 시행착오를 겪고 깨달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설령 강의가 있다고 한들 유익할 리가 없으며 아마 그다지 신경쓰지 않겠지요.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미 만들어진 코스 안에서 어떤 것을 고를지 고민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싫든 좋은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노트북에는 강의 노트 대신 일상의 고민을 적은 일기와 습작들이 빼곡하게 폴더를 채우고 있고, 듣고 읽는 시간보다 곱씹어보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휴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휴가라는 건, 개인적으로 ‘무엇이 더 재미있을지’ 에 대한 고민이었지 ‘무엇을 해야 좋을지’에 대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휴가라는 게 본질적으로 휴식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대야가 심각했던 어느 한여름 밤 퇴근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자면, 그건 아마 여태까지 일을 한 것에 대한 보상 같은 건 아닐 것입니다. 하루하루 만신창이가 되서 퇴근을 하기도 하고 별일없이 하루를 끝마친 적도 있었지만, 그날의 피로는 대개 그날 밤에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고 달콤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걸로, 혹은 주말에 어딘가에 놀러 가거나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소설을 읽는다거나 하는 걸로 어느정도 상쇄해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었습니다. 보상 개념으로써의 휴식은 아마 그 정도 만으로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휴가라는 건 과거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한 준비 시간 이랄까. 왠지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뒤로는 점점 힘들어질 지도 모른다, 라고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습니다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막상 휴가를 쓰고 아침 늦게까지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어째서 휴가를 써버리고 만 걸까, 라고 되묻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명확히 못찾은 채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아──, 미래에 대한 고민도 좋겠지만 일단은 시간이 있을 때 밀린 과거부터 해치우는 게 우선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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