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의 네온 사인이 밝게 빛날 때까지 많은 대화를 하고서, 끝내 막차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라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막차였지만 다행히 자리는 꽤 여유가 있었고, 오른쪽 뒤의 한 구석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순식간에 뒤로 흩어지는 창 밖의 밤풍경을 바라보며 괜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너무 단조로운 걸까──. 새로운 생각 없이 어제 머릿속을 맴돌던 그 생각 그대로 오늘도 여전히 한 걸음의 진전이 없는 채로, 어디까지나 시간의 흐름에 발을 맞춰 혹은 떠밀려 나란히 걷고 있을 뿐인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뿐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앞서는 방법 같은 건 그렇게 쉽게 떠올릴 수 있는게 아닌데.
물론 생각해보면 관점에 따라서는 다채로운 하루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새로웠던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매일이 새롭다면 하루하루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기만 하다가 끝날 테니까. 그래서 사실은 일상 속에서 매일 새로운 자극을 찾기 보단 같은 자극을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편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하루를 어떻게든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를 할 때가 있지만, 하루를 그저 겨우 버텼을 뿐임에 후회가 몰려올 때도 있었다. 관점의 작은 차이일 뿐이지만 두 가지 하루 끝에 쓰는 일기는 분명히 다른 느낌의 글이 나왔었다. 그건 분명 새로운 관점이 주는 다채로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출근할 때면 현관에 있는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저 반대편에서 마주보는 나는 그 나름대로 어디론가 출근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는. 같은 시간에 같은 복장으로 마주보고 서서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 왠지 또 다른 내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 눈빛에는'너도 지금 출근하니' 하고는 오늘 하루 힘내자는 무언의 신호를 담는다. 퇴근을 할 때도 마찬가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들어오기 전에, 마주보면 어디선가 너도 힘들었구나 하고는 그래도 잘 버텨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마주보고 있는 게 나 자신이라면 생각만으로도 그런 건 전달이 될 거라고──, 그렇게 멋대로 믿어버린다.
시간을 앞서면 좀 더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개인적으로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시간을 앞선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일단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그런 얘기를 들어봤자 와닿는 건 '좀더 빨리 늙으면──'이라는 의미 정도였다. 물론 그런 의미로 한 이야기는 아니었을테니 그 자리에서 물어보진 않았지만.
하지만 현관 앞에서 새로운 나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시간을 앞선다는 개념에서 착안한 것으로, 결국 앞설 수는 없지만 현실의 나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떠올리는 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거울의 반대편의 나는 현실의 나와 같은 복장으로 동시에 외출해서 동시에 귀가한다. 나와 동일한 만큼의 하루를 거울 속 다른 어딘가에서 살았을 것이다. 나와 똑같이 출근을 했을 수도 있고, 출근하는 척 하고 어딘가의 놀이터에서 하루종일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들어올 때면 나와 똑같이 힘든 표정을 짓지만, 그 일상은 나로써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거울의 반대편에 있는 그의 경험이 내 머릿속으로 전달될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는 분명 어딘가에서 나와 동일한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왔다는 것이다.
... 너는 오늘 하루 무엇을 했을까.
질문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일단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가방은 책상 옆에 놓아두고 커피포트에 물을 들여 놓은 채로, 그 옆에 서서 나름대로 상상을 한다. 너는 오늘 출근하는 척 하고 앙리 마티스의 전시회를 갔을 거야 역동적인 그의 작품들을 보고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어딘가에서 길거리 농구라도 한 판 했을지도 모르지. 저녁엔 강남 어딘가에서 친구를 만나 막창구이에 소주를 한 병 마시고 피곤하다며 그런 지친 표정으로 들어온 거겠지.
... 그리고 그렇게 상상해 본 거울 반대편의 나의 하루는 거의 대부분 내가 보내고 싶었던 하루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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